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트런드 러셀 (문단 편집) === 초기 경력 === 러셀은 앨리스와의 결혼 직후 2년 동안 미국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 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정경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강의했으며 (1937년 가을학기에는 science of power에 대해 강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했다. 1898년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조지 에드워드 무어|무어]]와 함께 관념론에 반기를 들었으며,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철학자들이 보통 물리적 실재론자라고 부르는 태도(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보통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1905년, 러셀은 철학 저널 《Mind》에 발표된 에세이 《On Denoting》을 썼다. 1907년에는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러셀은 총 세 번 하원에 출마했는데 싹 다 떨어지고 말년에 백작 작위 덕분에 상원의원직을 지냈다.] 러셀은 1907년 선거에서 자유무역, 여권신장을 외치며 출마했는데 (영국 여성에게는 1928년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반대파의 난동이 얼마나 거셌는지 [[1차대전]] 시기 반전운동을 했을 때 부딪힌 반발보다도 훨씬 심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이때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 중 '''여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남자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잃을까봐 위협을 하는 야만적 행동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여자들이 자신들의 모욕을 그대로 지속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 1908년에는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에는 [[화이트 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전3권)[* 원래 4권에서 기하학을 다룰 생각이었는데 무산되었다.]의 첫 권이 출간되었다. 난해한 수학공식으로 넘쳐나는 원고를 읽어본 케임브리지 출판부에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출판비를 대는 조건으로 [[출판|출간]]했다. 즉, 작가로서는 최대의 굴욕을 당한 셈이다. 정확히는 출판부에서 600파운드 정도 손실이 날 것 같은데 자기네들은 300파운드까지만 감당할 것이고 나머지는 왕립학회에다가 문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왕립학회에 300파운드를 지원해달라고 하자 왕립학회에서는 200파운드까지만 손실을 떠안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머지 100파운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반반씩 냈다. 러셀은 이 상황에 대해 유머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0년 동안 '''마이너스''' 50파운드를 벌었다."[* 이 시기 50파운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엥간한 서민 계층의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이 저작은 그보다 먼저 출간된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와 함께 러셀을 그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또한 같은 연도에 저명한 작가 오털라인 모렐과 만났으며 그녀와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수학원리 1권의 경우엔 현대에도 철학자들이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책이라고 한다. 2권과 3권의 경우엔 형식적인 증명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러셀 왈, "2권과 3권을 읽은 사람을 딱 여섯 명 알고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은 [[폴란드]]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게 제거된 것 같다.''' 나머지 셋은 [[텍사스]] 사람인데 나중에 사회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1911년에 그는 Principia Mathematica 하나만 읽고 무작정 맨체스터에서 기차를 타고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찾아온[* 책 머릿말에 저자들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들이라고 되어있는 것만 보고, 무조건 저자들을 만나겠다며 아무런 인맥과 인연도 없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간 것이었다. 근데 막상 러셀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의 저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딱 그해에 런던대학교 교수로 부임해서 케임브리지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인[* 당시 영국 맨체스터 공대 기계공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다. 이후 스스로 한학기를 휴학 후 케임브리지대학을 찾아가 러셀을 만나고 청강하다가 결국 공학박사의 길을 포기해버린다.]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러셀은 무작정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무실에 쳐들어와 코뿔소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그 청년[* 당시 러셀은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로 "그 독일인 청년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이 다 틀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괴롭다."는 말을 남겼다.]에게 애증을 느끼게 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여러 차례 일어나던 절망 따위와 씨름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자는 종종 러셀의 기력을 앗아가곤 했지만 러셀은 계속해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매료되었으며 그의 학문적 발전을 격려했다. 러셀은 무명시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로 희화화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보인 태도에는 일종의 이중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래도 애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러셀은 인싸 성격이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성격 자체가 인싸 성격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서 유명세를 얻고나서도 러셀이 기껏 만든 세미나 형태의 모임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만드는 일들이 있었고, 러셀은 이에 반감을 가졌었다.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분석철학]] 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은 뒷날 이 운동에 공감하지 않았다. 논리적 원자론 철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제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기본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학설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는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줄곧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에서는 '구조의 유사성'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인과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러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저서 『철학적 탐구』와는 의견을 달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